언어, 이야기/Tageswort2018. 8. 20. 19:03

집에 돌아와 가만히 누워 있는데, 스물한 살 시절 베를린의 작은 방-어쩌면 큰 방-이 떠올랐다. 아마도 폭풍이 온다는 주중의 날씨 탓에 창밖이 흐려서일지도 모르고, 오늘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이의 비행을 오전 내내 상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렴풋이, 비행기 타기 전에 전화할게, 라고 했던 것 같은데, 10시 인지 12시인지 모를 비행기 시간 언저리에 그의 전화가 올까봐 나는 간만에 찾아가 익숙지 않은 나의 부모님 집에서 몇 번을 전화기를 들었다 놓으며 벨소리를 최대치로 올려놓았다.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려 제사도 아닌 날 부추전을 만들고 있는 시간이었다. 부모님의 집은 아침부터 나를 깨어있게 했고, 나는 엄마를 매 순간 속상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고, 집에서의 나는 아직 꼬마 같았고, 창이 많아 환기가 잘 되는 집에는 며칠 뒤의 폭우의 냄새가 실려왔고, 환했다. 환하고 환한 아침, 내내 파리로 가는 비행기 생각. 엄마 나도 나가 살래. 어제 저녁 차 안에서 엄마한테 나는 이야기 했고, 그리고 가보지 않은 파리 생각. 오늘 베를린의 방을 떠올린 건 아마도 그가 그의 첫-편지에서 그를 살아가게 한다는 여러 날들 중 스무 한살의 어떤 날들을 언급해서였는지도 모르고, 이주 전쯤 그가 파리에서 거주했다는 하녀들의 집의 외관을 본 잔상이 남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보여준 건물 거리는 베를린과 유사했는데, 구글 로드뷰 사진은 훤한 대낮이어서 누구에게도 먼 곳처럼 느껴질 풍경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어쨌든, 그의 파리를 상상하며 나는 오늘 갑자기 스물한 살의 내 방이 떠올랐다.

 

스물한 살, 내가 그래도 꽤 오래 거주했던 그 방은 독일에서는 흔치 않은 높은 건물에 8층 쯤 자리한 집이었으며, 풀옵션 원룸이었고 큰 두 개의 창이 베를린을 먼 곳까지 드러내는 바깥으로 나 있었다. 실내에서 연결된 옆 건물 6층쯤에 내 방보다 조금 작은, 교회 종소리가 보다 더 잘 들리는, 몇 건물의 지붕이 보이는 쪽으로 창이 난 방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애인은 내 성화로 아마도 내 성화 탓에- 내 방에서 함께 지냈다. 오늘날 감은 눈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 개의 창문. 그리고 그가 내리던 커피다. 그는 한국에 있었던 시절부터, 신촌 아주 작은 방, 그러니까 50030짜리 방이었나, 그가 잠시 거주했던 정말 오래된 방에서도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 마셨던 것 같다. 모든 동작이 차분했던 당시의 애인은 그래서인지 고운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단단한 손가락이 핸드드립커피와 잘 어울렸다. 그때의 커피 맛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가 아침마다 주전자에 물을 올려 구태여 내려주던 커피는, 모든 흔들리는 기억 사이에서도 사실인 것 같다. 아침을 여는 향. 내 방에는 아침마다 그가 내리는 커피 향이 났다. 독일에서는 추운 날의 기억이 더 많은데, 그는 좁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아침이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 간밤에 쌓인 공기 위를 훑고 지나가는 바깥의 추운 공기는 기분 좋게 상쾌했고, 그때 난 이불 속에 더 숨어들곤 했을 것이다. 그 아침을 여는 행위가 좋아 가끔은 내가 창문을 열었던 것 같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거의 매일 우리는 그랬다. 창문을 열고, 이불을 둘둘 말고, 담배를 하나 말아 피우고, 커피를 내리고.

 

일 년이 넘는 교제기간 동안 그와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는데, 이것은 확실치 않지만, 단 한 번도 싸우지 않다니 이례적이며 지루한 일인걸, 이라고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를 보며 읊조렸던 그 순간의 생각이 기억난다. 그는 정말이지 동요 없이 차분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내 생에 가장 아빠 같은 -아버지도 아닌 아빠 같은- 역할을 해준 사람이었다. 본인도 불안했을 모든 생활과 시간 속에서 늘 내 불안만을 떠올리게 해주었으니, 그는 참으로 의젓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감정은 요동쳤고, 무서워 집앞도 혼자 나가지 못했던 날들에 그는 매일같이 별 말 없이 안아주고, 손 잡아주고, 침묵으로 다독여주었다. 흔치 않은 풀옵션 건물은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마도 외국인 거주가 용이한 외국인전용임대아파트였던 것 같고, 그 중에서도 내 방은 큰 편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 쪽에 와 있었지만 방의 큰 창과는 달리 침대는 완전한 싱글이었고, 둘이 잠들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그런 침대에서도 그는 늘 아마도 내 성화 탓이 맞을 것 같다- 떨어질 위기를 넘기며 몸을 세워 나를 안아주며 잠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품이 넓었던 당시의 그도 지금의 내 나이 정도였다. 내 매일의 잠꼬대를 버티어냈을 그의 잠결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러던 나는 어느 날 그를 보며 생각한다. 이렇게 싸우지 않고 지내는 사이가 좋은 걸까. 이 사람 때문에 내 감정도 무뎌지는 것은 아닌가.

 

조소과를 졸업했던 그는 회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커피를 내리는 그 차분하고 둔탁한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보고싶다고 늘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는 내 오른쪽 귀가 귀 표본과 거의 일치한다며 내 귀를 예쁜 표준 귀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내가 내 몸에 대해 물어봤었나, 어깨가 살짝 줄고 골반이 조금 더 넓어진다면 흔히 말하는 표준 미인-아마도 비너스상이겠지-에 가까워진다고 언급해줬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뭐라고 했든, 누구보다 예뻐해줬던 것 같다. 그가 찍어준 사진들은 여전히 너무 예쁘고, 누가 찍어준 사진보다도 예쁘다. 당시의 오라버니들이 찍어준 사진들은 전부 그랬던 것 같은데, 애인이 유독 더 예쁜 사진을 찍어주었던 건 당연하다. 그 중 으뜸인 것은 독일에 도착한 다음 날인지, 그 다음 날인지 어느 목사의 집에서 찍어준 웃는 사진인데, 지금 얼굴과, 어쩌면 당시의 얼굴과도 많이 다를지 몰라도 개구지게 웃으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은 아무리 다시 모방하려해도 실패할 것이다. 당시 내 나이 스물한 살. 그 응시.

 

그 시절에는 유독 언니와 오빠들이 주변에 많았는데, 어쩌면 내가 어렸으니 당연한 일이고, 그래도 유난히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났었다. 애인은 나와 일고여덟 살 정도 차이가 났던 것 같고, 그 위로 세 명이나 있었다. 아직은 오빠들을 오빠라고 부르던 그 시절 나는 꽤 많이 예쁨을 받았던 것 같고, 많은 챙김을 받았다. 내 방보다 몇 층 더 위에 살던 언니 같은 오빠는 가끔 불러 맛있는 음식을 뚝딱 해주었고, 매일같이 우스운 잔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사진을 좋아하던 그 오빠가 찍어준 내 사진도 예뻤다. 다른 오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종종 내 방에 내 애인까지 모여 맥주도 마시고 먹을 것도 해먹고 그랬던 것 같다. 모두 잘 사나. 모두 뭐 하며 지내려나. 어디서 지내려나. 내 짧아진 머리를 슬퍼하던, 늘 내 엉덩이인지 어딘지를 만지던 예쁜 언니는, 여전히 내 셋째 서랍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사진 속의 언니는 바우하우스를 나와 무얼 하고 살고 있으려나.

 

이런 어느 날들 탓에 내가 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오늘 파리로 떠난 사람의 편지 탓에 생각해봤다. 너무나 잊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날들의 일이며, 어느 날로 인해 덮어져 지워진 기억들인데, 생각해보면 길고도 유난스러운 시절이었다. 유난히 노래를 잘 하던 당시의 애인이 부르던 노래의 목소리는 기억이 안 나지만, 허접한 가라오케 시설과 매일 다른 노을을 보여주던 큰 창의 빛나는 순간들은 기억이 난다.

 

아마 당시의 애인 탓에, 그 차분하고 정제된 몸짓 탓에, 지금의 나는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수 있는 아침을 가장 여유로운 아침으로 꼽으며, 여전히 영원히 그런 아침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런 애인의 이름을 생각해내는데 나는 몇 십 초나 걸렸다. 그것도 이번엔 그나마 빠르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묻혔을지 몰라도, 당시의 나를 알던 사람들과, 당시의 날들을 보내던 그 시절의 그들. 서로 잊었다 하더라도. 그런 날들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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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h.ro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