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입니다. 매일이 절망적입니다. 때론 절망적이어서 사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낀 날은 뒤이어 절망이 옵니다. 아름다움을 두 배로 느낀 날은 뒤이어 더 큰 절망이 옵니다. 이렇게 나고 자라 손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 때쯤 나는 성인이었고, 절망을 받아들이자 어른이 되었고, 절망과 친해지려 애쓰다보니 세월이란 것이 나를 지나쳐 갔습니다. 때론 말입니다. 때로는 절망 뒤에 아름다움이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아름다움 뒤에 안식이 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때는 이미 절망과 고독이 이 눈동자에 깃든 후였습니다.”
늙은 코끼리의 눈이 말했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의자에 앉은 코끼리는 두터운 가죽 아래로 눈물을 툭툭 떨어트린다. 어쩐지 오늘 그는 눈동자 밑바닥에서 나약을 조금 꺼내 벗겨진 살갗을 치장한다. 코끼리의 머리 뒤로 그가 목을 매단 아홉 개의 밧줄이 떠오른다.
“몸이, 이 몸뚱이가 너무 무거웠던 게지요.”
무거워서 살았던 코끼리는, 두터운 앞발을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는다.
‘차가 많이 식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다 해도, 한때 뜨거웠던 탓에 이리 향기롭지 않습니까. 계속 뜨겁다 해도 곤란했겠지요. 지금은, 지금은 이렇게 벗겨진 가죽도 쓰다듬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코끼리가 코를 들고 껄껄 웃는다. 코끼리의 코는 빈 잔을 나의 손 위에 올려놓는다. 빈 잔 속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며 가득하다. 떼 지어 나약하게 흔들리는 것들이 천지를 뒤흔든다. 언젠가 가보지 않아도 걸었던 길. 그 길 위로 코끼리의 눈이 걸어간다.
-맞아요. 이곳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지난날의 음성이 반복되어 재생된다.
-맞아요. 이곳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맞아요. 이곳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맞아요. 이곳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맞아요. 이곳에...
‘그 곳에, 지금쯤 코스모스가 피었나요?’
가지 못할 길을 걸으며 코끼리의 눈이 여인의 음성을 곱씹는다.
-맞아요. 이곳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오셔야지요.
-와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장 좋아하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를
-보셔야지요.
-...
-보셔야지요.
‘보고 있는걸요.’
여인은 답이 없다. 나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놓았다. 만개한 코스모스는 바닥으로 내리 날리고 유리잔 속에 갇힌 목소리는 꽃무덤에 묻혀 세상이 조용하다. 또 한 번 코끼리는 껄껄 웃는다. 그가 두터운 앞발로 엎어진 잔을 내리 누르니 유리조각들이 테이블에 흩어진다. 코끼리는 코를 들어 한 조각씩 자신의 늙은 눈에 집어넣는다. 반짝반짝, 코끼리의 늙은 눈이 빛난다.
“머나먼 곳 그 여인의 치맛자락이 코스모스 향에 날릴 때..”
코끼리가 꺼이꺼이 노래를 부른다.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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