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이야기/Tageswort2016. 12. 27. 22:57

17살의 첫사랑은 서울 어딘가 오래된 옥탑에 살고 있었다. 첫사랑이라 말한다 해도 이름조차, 입술의 형태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뭉그러진 기억 속에서 몇 개의 거미줄 같은 실자락들을 더듬어 보자면, 그의 나이, 몇 개의 빨간 스폰지 공들, 트럼프 카드.. 그 정도가 기억난다. 언젠가 가야금을, 지금도 가야금을 한다는, 앞으로는 가야금을 할 일은 없을 거라던, 마술사. 그의 마술 도구 중 어느 하나의 귀퉁이에는, 나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종로에 나가 그를 만났던 날, 종로 2가에서 마주한 그는 나의 양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었다. 양손에 잡은 아이스크림은, 마치 어여쁜 풍선 같았고, 내 마음은 풍선마냥 떠다녔다. 번호는 기억나지 않는 파란 시내버스를 타고 그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낯선 그의 동네는, 높은 건물이 없었던 것 같다. 오래된 작은 동네에는 빌라같은 다세대 주택들이 놓여있던 것 같다. 아마도 그에 걸맞게 세탁소나, 오래된 분식집과 같은 작은 가게들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덧붙여보려, 혹은 닦아내보려 노력해보지만, 길은 길이었다는 기억 뿐.

그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작은 골목 모퉁이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그 담배는 무엇이었을까. 원래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 담배는 나를 위한 것이었고, 아마도, 그런데, 그 담배는 무슨 담배였을까. 내가 고른 것일까, 그가 고른 것이었을까. 담배를 태우고 싶다는 나의 말은, 태우고 싶다는 혼잣말의 어조였을까, 그러니까 사달라는 애교였을까, 필요하다는 직접적인 부탁이었을까. 그 이야기를 들은 마술사의 표정은, 어떠했던가. 어찌되었든, 그는 흔쾌히 담배 한 갑을 사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집이 있는, 집이라기 보다야 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만한 그의 공간이 있는 건물을 오르기 시작했다. 2층 쯤 오르고 나니, 그 층에는 어떤 가족- 어렴풋하게- 어떤 여자- 젊은 딸- 혹은 상상- 살고 있었고, 살금살금, 그 위로 외벽을 따라 나 있는 철재 계단을 올랐다. 이 중,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계단-이 있지 않았나 하는 기억. 집 안에 있는 집, 어떤 셋집 같았던 기억. 분명히 옆집은 없었던 것 같은 기억. 그러니까, 옥탑이 아니었을까.

작은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방 안에 들어앉은 물건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치열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작은 창문 아래 작은 침대, 그 측면의 책상, 그 위 컴퓨터 정도의 가구가 기억난다. 치열하게 살아남아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물건 본연의 역할을 다 하는 것들 가운데, 방의 주인행세를 하며 눈길을 끌었던 것은 두 면을 차지한 여러 겹의 캔버스들이었다. 아마도 그 중 나를 압도한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한 기억으로는, 보다 큰 벽쪽이었나 침대 뒤였을까-, 가로로 꽤 길고 크게 늘어진 캔버스 안에 누워있는 유화로 그려진 나체의 여성이었다. 옆으로 누워있는 여성. 이 또한 상상에 불과 할까. 여러 겹의 캔버스들. 그것들은 그저, 전에 살던 미대생이, 그림을 잠시 맡아 달라 부탁했다 라고 그가 이야기했던 기억까지 가짜일까.

치마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몇 봉지의 과자가 있었나. 부스럭, 아작아작하는 음성 기억. 17살의 나는 무지(無知)를 무기로, 호기심을 방패로 작은 침대 위에 엎드려서 천진난만함을 입었다. 보이는 대로라면, 나는 충분히 매력적인 천진난만함을 입었다. 그리고 그는 손끝으로 그 천진난만함을 들이마셨다. 그 이후는 white out. 백시(白視) 안 어딘가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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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oh.ro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