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청소가 제격이다. 베란다에서 먼지 쌓인 선풍기를 꺼내들었다. 어차피 여름은 올 테고, 시간이 있을 때 닦아놓자는 마음이었다. 전남친이 주고 간 선풍기는 받았을 때 느꼈던 것보다 배는 더러웠다. 다시 여름이 오기 전에 헤어질 걸 알고서는 내 집에서 폭파해버리라고 주고 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11개의 나사를 풀고 앞뒤를 분해하고,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물티슈를 반통이나 써가면서 한시간정도 선풍기를 문질렀다. 내 서러운 마음들도 곱게 닦여나가길 바라면서 열심히 문질렀다. 서러웠다. 오늘 그리고 어제, 그리고 엊그제 서러웠다.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한 시간 동안, 앞으로의 시간에서는 내가 서럽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모든 건 애정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모든 건 작은 질투 때문이었으리라. 질투 또한 애정 때문이었으리라. 애정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일 거고, 태어난 건 엄마 때문일 거고, 엄마는 나를 낳았기 때문에 서러웠으리라. 서럽고 서러운 이유로 서럽게 서러운 시간들이 중첩되니 나는 어쩌면 서러운 게 당연하다. 모든 사람이 내 맘 같지는 않아서, 라는 어엿하게 예쁜 말도 되뇌어 보고, 이 모든 건 반지르르한 대가를 바라는 좁은 애정의 자기횡포라고 근엄하게 타일러도 보고, 어쩌면 모든 건 내가 잠시 힘들어서 그래, 라며 회피도 해본다. ‘어쩌면’이 수십 번 쌓이고 나니 구멍이 뚫릴 데로 뚫린 젠가처럼 내 차례로 돌아왔다. 한 번 더 ‘어쩌면’을 외치고 나는 파산했다. ‘어쩌면’도 종국에는 서러웠다.
나의 서러움을 잘 알 것 같은 사람이 떠오르다, 금방 사라졌다. 이제 정말이지 나와 그는 멀어진 것이다. 나의 서러움을 그가 알 리 없다. 자기 삶에 사람 하나 들일 땅 없는 사람이 이 서러움을 알 리 없다. 그는 자신이 설 땅조차 갖지 못해서 땅 찾으러 이 나라 저 나라 떠돌고 있단다. 다른 놈은 ‘월세는 내는데 쉴 곳은 없다’는 노래를 구구절절 틀어 놓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고, 보자 하면 반갑게 봤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정말 저 변두리 옛 고향 펜션처럼 생각한 것 아니겠나 싶다. 이런 생각 드는 걸 보니 그이와도 난 많이 멀어진 것이다. 언젠 가까웠겠냐마는. 가장 어여쁜 친구는 어여쁜 애인이 생겨서 나를 잠시 잊었다. 그녀가 나를 애인이라 부르다가 친구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선언한 순간부터 예정되었겠지만, 나는 긍정의 뜻으로 끄덕거리면서도 그 부름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한 것 같다. 난 언제나, 그리고 오랜 시간 그녀가 말하는 ‘노력’이란 것을 해왔고, 그건 나에게도 애정을 주는 행위였다. 그러나 홀로의 시간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나 홀로 무언가 하는 것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상대가 나와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을 받는 것이 ‘유일’하게 즐거운 나에게는 ‘노력’이라 불리우는 그것은 애정하기에 행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애정’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말하는 ‘친구’는, ‘노력’이 애정에 따르는 선택적 부차 개념인 상태에서, ‘노력’이 필요 없는 ‘애정’의 범위 내에서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상태에서 우연히 그것이 맞는 순간에 함께 하는 것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애인이라는 말은 편안했는데 친구라는 말은 어려웠다. 그래서 늘 ‘우리’의 시간은 빗나갔다.
내가 사랑한 이들은 대체로 땅이 없거나, 땅 그자체이거나, 혹은 돌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라서, 텅 빈 땅만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러운 이들이었다. 나는 내 땅이 우는 만큼 서러웠다. 넓은 땅 여기저기 모래 바람 스쳐간 자리에 뿌리내린 콩들이 자란다. 이번 가을이 오면 저 콩 따먹고 콩 줄기들 모두 베어내야지. 그리고 겨우내 땅 뒤집어 비옥한 땅 만들어야지. 다음에는 꼭, 표류하는, 비행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지. 비옥한 땅에 활주로 그려놓고.
(그러나 이 모든 서러움이 '어쩌면'이라는 애정 때문이라면, 그리하여 '어쩌면' 태어난 나의 탓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서럽기로 결심한다. 계속 서럽길 바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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