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는 편지.

 

고야, 사랑 없이 살지는 말자는 말을

다시 한 번 아무 거리낌 없이, 웃는 마음으로 건네기까지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네. 이 또한 시나고 보면 짧은 시간일지 몰라도.

언젠가 올 거라 기대하지도 못한 날을 만난다는 건, 살며 몇 안 되는 진실한 재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좋아했던, 쓰지 않은지 오래인 연필을 잡아본다. 이제는 편지를 쓰려고 하니, 얻다 써야 하나란 생각부터 들더라. 그 많던 새 편지지는 다 어디로 갔나. 참 여러 일기와 편지들을 보내지 못하고 적어두었는데. 이건 보낼 수 있으려나.

 

삶은 혼자라는 너의 말은 너무나 맞아.

그 말을 스스로 내뱉을 수 있게끔 흐른 몇년이었어.

오늘 내가 받은 전화의 수는 약 스무 통.

종일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앉아있었는데, 별로 한 일이 없어.

참 많은 대화를 하고도 곁에 사람은 없고, 모든 시간의 행위의 당위성은 돈 몇 푼으로 남아.

이 길에 뭐가 있을지, 이 끝에 뭐가 있는지 묻고 답하는 건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만 바라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 잠시 짬이 났을 때 지난 반 꾼 꿈을 떠올리고는 동행복권 사이트에서 삼십 분 정도를 놀았어.

로또와 연금복권 말고도 다양한 놀이들이 십만 원과 한 시간이라는 제한을 두고 펼쳐져 있더라.

무슨 게임인지도 모를 게임들을 하고 보니 이만 원을 넣고 이만삼천 원 정도를 쓰고 오천 원 정도가 남았어. 얼마 정도 땄다는 거지.

게임에는 나름의 장치들이 있는데, 게임결과를 바로 보여주지 않아.

버튼을 누르자마자 낙첨 결과가 떴을 때 느낄 허무함을 줄이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어.

중독과 호기심을 제어하는 가장 큰 감정은 흥미를 느낄 새도 없는 허무함 아닐까.

 

기대하는 것들이 그 어떤 결과도, 그 어떤 과정도 없이 사라질 때 삶이 그 자체로 유효하더라. 덩그러니. 어떤 이유도 없이. 목적도 없이.

 

거기에 혼자라는 감각이 굉장히 잘 어우러져서 부유하는데, 아마 스스로 지지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감각이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어떤 기대도 필요 없는 기분 말이야.

 

내 삶에 어느 분기점을 지난 흔적들이 있다면

표정과 감정, 말투와 생각, 그 모든 시작점에 네가 있을 거야.

살며 겪은 가장 큰 회의와 허무.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에 네가 놀랄 때 나는 너무 놀랐어.

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너에게는 그토록 먼 이야기였나 보다.

 

많이 사랑했고 많이도 미워했는데. 돌고 돌아 가벼워지는 날도 온다. 그러고선 또 슬프기도 해.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되더라도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도 꽤 길어. 

그만큼 힘들고 밉고, 너무 많은 흔적이 남아 앞으로가 더 무서웠는데.

이제 아무렴 어떤가. 그냥 좋다 싶은 날도 오는구나.

 

어쩌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빙글빙글 곁에서 부유하며 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아닌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내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고야야.

너를 사랑하는 일이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 

나는 끝까지 너를 아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이, 우리가 사랑했던 서로가 아직은 놓고 싶지 않은 것들이라

나는 네가 끝끝내 아름답길 바라.

 

혼자라는 건,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그러니 더더욱 아닌 순간들이 아름답고 소중한 거겠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체념으로 살기엔

너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야.

혼자인 삶에 기적인 일들을

환상으로 만들지는 말자.

그리고 조금만 더, 아껴서 살자.

 

 

 

2021 어느 날, 아마도 그날이 오기 조금 전에 쓴 결국은 보내지 못한 수필편지를 조금 고쳐서 옮겨 적음.

갈색 내지 노트

'언어, 이야기 > <Die Brie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0309  (0) 2021.03.10
편지 1-1) 안부  (0) 2018.05.06
1. 160522  (0) 2016.05.22
Posted by oh.roze